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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보도자료] 고(故) 임세원 교수를 보내며  
글쓴이 홍보및정보 글번호 47095
등록일 2019-01-16 조회수 250

   

() 임세원 교수를 보내며

 

   구만 육천 삼백 육십 시간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정신과 전문의로 성장하기까지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 군복무를 해야 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전문의에서 다시 전임의를 거쳐 환자들을 책임지고 진료하는 교수가 되기까지의 시간 또한 이에 못지않다.

 

      한 시간

한 사람의 세계가 사라지는데 소요된 시간. 사랑하는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우리 역시 정신건강 장면에서 진심을 다해 분투해온 유능한 인재를 너무나 허망하게 잃었다.

 

      지난 토요일, 임 교수님의 추모식장을 찾았다. 너무나 황망한 사건으로 미처 조문하지 못한 것이 마음의 짐이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였다. 평소에 조직 간 노선 차이와 이권의 문제로 관계가 편치만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뜻으로 모인 자리였다. 해당 사건은 정신건강의학계에서 이례적으로 발생하는 사고가 아니라 환자와 함께하는 모든 전문직역들이 느끼고 공감하던 문제였다. 병원에서 임상심리전문가로 근무하던 기간 동안 필자도 정신병적 상태를 보이는 환자들에게 위협을 당하거나 심지어 고소를 당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이곳에 찾아온 모두에게 이 비극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일 것이다.

 

      문득 돌아보니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 참 오랫동안 이런 위험성을 잊고 살아왔었다. 임상의 최전선에서 환자들을 평가하고 치료하는 심리학자였으나 어느 순간 책과 논문에 파묻혀 참으로 안전한 환경에 안주해 있었다.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운 일이다. 토요일 오후, 지금 이 순간에도, 십수 년 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의료 현장에서 환자들을 위해 소중한 인생을 바치고 있는 동료들과 인접 영역의 전문가들에게 때늦은 감사의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뒤섞였다.

 

     불행히도 임교수님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얼마가지 못할 것입니다. 수많은 새로운 뉴스에 묻혀서 금방 잊혀져 버릴 것입니다..” 추도식이 끝나고 행사 준비위원 간담회에서 나온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권준수 이사장님의 말씀은 기우가 아닐 것이다. 금세 들끓고는 빨리 잊혀지는 한국사회에서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도적인 변화의 단초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고객만족을 서비스의 최대 가치로 신봉하고 있지만 그에 비례하여 동반 성장해야 하는 서비스 제공 인력에 대한 지원과 존중은 여전히 빈약한 수준이다.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는 갑질 논란은 서비스 제공자에 대한 권리를 배제한 체 이용자의 무한 권리만을 강조하며 생긴 부작용이다.

 

      정신질환을 가진 국민의 인권과 그들이 좋은 치료를 받을 권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의료 및 정신건강영역 종사자와 기관 운영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는 사상누각에 다름 아니다. 타인의 아픈 마음을 공감하고 치유하고자 십수 년의 수련을 받아온 전문인력들이 생계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라면, 언젠가 이는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자에게도 큰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다.

 

      환자의 충동적 행동에 대해 우리 사회 역시 충동적 제도변화로 대응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과학적 자료와 타당성 검토를 통해 진정 환자와 정신건강 종사자들의 권리가 모두 보장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족들의 이야기처럼 모든 환자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 되어서는 안 될 것이겠으나, 다만 피의자를 면밀하게 조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정신장애인을 관리하는 시스템 중 어디에 구멍이 나 있었는지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또한, 입원 및 환자관리 등에 대해 성급한 변화를 도모하기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무엇이 개선되어야 할지에 대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퇴원한 환자들이 자해 및 타해에 이르는 위험한 행동을 감행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정기적으로 평가하고 이들에게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환자 위험성 평가시스템 개발을 위한 연구에 국가 수준의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사건 발생 3주가 흐른 지금, 정신건강 영역에서 추모의 분위기가 계속해서 무겁게 이어지고 있으나 이후 벌어질 문제들에 대해서는 결코 낙관할 수만은 없다. 자타해의 위험성이 있는 정신질환 환자들을 위한 보호병동을 대형종합병원들이 계속 운영하려 할지에 대한 염려는 이미 오래된 걱정이다. 대학병원을 떠난 입장에서 이제야 거리를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날로 악화되는 보험수가의 압박에서 정신과 병동은 이미 병원 경영진의 눈 밖에 난 지 오래라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이기에, 대형병원들이 정신건강의학과의 보호병동과 필수 인력들을 유지하도록 제도적으로 규정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해당 인프라 구축을 위해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미래의 인력수급에 대한 부분 역시 걱정이 앞선다. 10만 시간에 육박하는 교육비를 스스로 부담하면서 굳이 돈이 안 되고 생명의 위험까지 따르는 정신건강의학과의 진로를 택할 뜻있는 의학도가 줄어들까 염려된다. 정신건강전문요원도 마찬가지의 위기에 처해있다. 국가 정신건강을 책임질 인력의 양성을 모두 병원과 재활기관에 떠넘긴 탓에, 정신건강임상심리사의 수련기관은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그 처우는 매우 열악해져 수련 중 이탈자 증가가 가시화되고 있다. 국가가 책임지고 양성해야 할 전문인력이 법조, 행정, 외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정신건강 전문인력들이 국민의 건강과 행복추구권을 위해 꼭 필요한 우리 공공의 재산임을 명심해야 한다. 개인의 업무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이며 공익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실제 그 노동이 시장에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없다면, 반드시 국가가 그 인력의 양성과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적극적 투자를 해야 한다.

 

      차가운 바람이 몸을 파고드는 토요일 저녁이다. 오늘의 추도식이 지금으로선 한 의인의 죽음을 기리는 자리로 기억되겠으나 훗날 한국 정신건강체계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첫 날이었음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길 소망한다.

 

작성자: 최승원(한국임상심리학회 총무이사, 덕성여자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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